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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과 장미전쟁: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과 왕위 계승 전쟁

by dailypick4 2024. 10. 17.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과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은 중세 말기와 근세 초기에 발생한 두 중요한 전쟁으로,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대립, 그리고 영국 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입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약 11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며, 장미전쟁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배경, 주요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1. 백년전쟁 (1337년 - 1453년)

 

백년전쟁의 배경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16년 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진 전쟁으로, 주로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잉글랜드 왕의 권리 주장이었으며, 양국 간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것이 주요 배경입니다.

 

  • 왕위 계승 문제: 1328년, 프랑스의 카페 왕조가 단절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은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Philip VI)를 왕으로 선출했으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Edward III)는 자신의 어머니가 프랑스 왕의 누이였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 경제적 갈등: 백년전쟁은 또한 경제적 갈등에서도 기인했습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플랑드르 지방과 활발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이를 방해하려 했습니다. 양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전쟁이 장기화되었습니다.

 

백년전쟁의 주요 전개

백년전쟁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초기에는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프랑스가 승리하게 됩니다.

 

1) 제1단계 (1337년 - 1360년)

초기에는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북부에서 주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346년의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와 1356년의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에서 잉글랜드 군대는 프랑스군을 압도하며 중요한 승리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의 장궁(longbow) 부대는 전장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 브레티니 조약(1360년): 전쟁은 1360년, 브레티니 조약(Treaty of Brétigny)을 통해 잉글랜드가 아키텐과 가스코뉴 지역을 확보하며 잠시 휴전되었습니다.

 

2) 제2단계 (1369년 - 1389년)

그러나 전쟁은 곧 다시 재개되었고, 프랑스의 샤를 5세(Charles V)가 왕위에 오르면서 전세는 프랑스에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샤를 5세는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점령지를 성공적으로 회복했습니다.

 

3) 제3단계 (1415년 - 1453년)

1415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Henry V)는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는 프랑스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1420년)을 통해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자신의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1429년, 잔다르크(Joan of Arc)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사기를 높이며 오를레앙 전투(Battle of Orléans)에서 승리했고, 이는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결국, 1453년 프랑스는 카스티용 전투(Battle of Castillon)에서 잉글랜드를 물리치며 백년전쟁이 끝났습니다.

 

백년전쟁의 결과

백년전쟁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프랑스의 승리와 중앙집권화: 백년전쟁의 승리로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세력을 물리치고 영토를 통합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잉글랜드의 혼란: 잉글랜드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정치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왕실과 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이후 장미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2. 장미전쟁 (1455년 - 1487년)

 

장미전쟁의 배경

장미전쟁은 백년전쟁 직후,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벌어진 내전으로, 요크 가문(House of York)과 랑카스터 가문(House of Lancaster)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두 가문은 각각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며, 각각의 가문을 상징하는 하얀 장미(요크 가문)와 붉은 장미(랑카스터 가문)에서 전쟁의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 헨리 6세의 약한 통치: 장미전쟁은 특히 헨리 6세(Henry VI)의 약한 통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헨리 6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고, 그의 통치는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을 촉발시켰습니다. 요크 가문은 헨리 6세가 왕으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위를 요구했습니다.
  • 귀족들의 대립: 이 시기 잉글랜드는 왕권이 약해지면서 귀족들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왕권을 차지하려는 요크 가문과 랑카스터 가문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장미전쟁의 주요 전개

장미전쟁은 1455년에 시작되어 1487년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으며, 양측의 왕권 주장과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1) 요크 가문의 승리

초기에는 요크 가문이 우세를 보였습니다. 1461년,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Edward IV)가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에드워드 4세의 군대는 토우튼 전투(Battle of Towton)에서 랑카스터 가문을 물리치며 잉글랜드를 장악했습니다.

 

2) 랑카스터 가문의 반격과 헨리 6세의 복귀

그러나 랑카스터 가문은 왕위 복귀를 노렸으며, 1470년에는 헨리 6세가 잠시 왕위에 복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복귀는 오래가지 않았고, 이듬해 에드워드 4세가 다시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3) 보즈워스 전투와 헨리 7세의 즉위

장미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Field)**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요크 가문의 마지막 왕인 리처드 3세(Richard III)가 패배하고 전사하였으며, 랑카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Henry Tudor)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장미전쟁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 튜더 왕조의 시작: 헨리 7세는 왕위에 오른 후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며, 요크 가문과 랑카스터 가문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튜더 왕조(Tudor Dynasty)를 열었습니다. 이 결혼은 장미전쟁을 마무리 짓고, 잉글랜드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미전쟁의 결과

장미전쟁은 잉글랜드 정치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왕권 강화: 헨리 7세의 즉위로 잉글랜드는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으며, 튜더 왕조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고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귀족들의 몰락: 장미전쟁 동안 많은 귀족 가문들이 몰락하였으며, 이는 헨리 7세가 왕권을 강화하고 독립적인 귀족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결론: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역사적 의의

 

백년전쟁장미전쟁은 중세 말기와 근세 초기에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전쟁들입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국의 중앙집권화를 촉진하고 잉글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으며, 장미전쟁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내전으로, 튜더 왕조의 성립과 왕권 강화를 이끌었습니다. 이 두 전쟁은 유럽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근대 국가 체제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